1. 사안의 개요
피고는 1996년 1월경 수출 1,000억 불 달성을 기념하고 무역의 중요성 및 수출증진에 관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목적으로 통상산업부와 협의하여 D 센터 부지 내에 수출 1,000억 불 달성을 기념하는 영구 조형물(이하 '이 사건 조형물'이라고 합니다)을 건립하기로 계획하고, 그 건립사업의 추진을 위하여 피고 산하에 수출 1,000억 불 기념 E 위원회(이하 '이 사건 위원회'라고 합니다)를 결성하였습니다. 이 사건 위원회는 1996년 1월 25일 1차 회의를 개최하여 이 사건 조형물의 건립 방법에 관하여 분야별로 5인의 작가를 선정하여 조형물의 시안 제작을 의뢰한 후 그중에서 최종적으로 1개의 시안을 선정하는 것으로 결의하였고, 1996년 2월 12일 2차 회의를 개최하여 시안 제작을 의뢰할 작가로 F 대학교 예술대학 조소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원고를 비롯하여 소외 G, H, I, J 등 5인을 선정하였습니다(다만 위 H은 선정 직후 사퇴하였습니다). 피고는 1996년 3월경 원고, 위 G, I, J(이하 '원고 등 4인'이라고 합니다)과 사이에, 원고 등 4인은 1996년 5월 15일까지 이 사건 조형물의 시안을 제작하여 피고에게 제출하고 피고는 그에 대한 보수로 1인당 금 500만 원을 지급하기로 약정하였고, 그 무렵 원고 등 4인에게 시안 제작비로 각 금 500만 원을 지급하였습니다. 원고 등 4인은 1996년 5월경 위 의뢰에 따라 위 조형물의 시안을 제작하여 피고에게 제출하였습니다. 피고는 1996년 6월 24일 심사위원회를 개최하여 조형성 및 상징성을 수정, 보완할 것을 조건으로 원고가 제출한 시안을 이 사건 조형물의 최종 시안으로 선정하였고, 1996년 8월 16일 그 사실을 원고에게 통보하였습니다. 피고는 1996년 및 1997년에는 이 사건 조형물 건립사업에 관한 예산으로 무역진흥기금에서 금 7억 4,000만 원을 배정하였으나 D 센터 확충사업에 관한 세부설계 작업이 지연되는 등의 사유로 사업을 진행하지 못하였고, 1996년부터 1999년까지 산업자원부 장관이 5차례 변경되면서 사업에 관한 정부의 관심도 줄어들자 1998년 이후에는 사업에 관한 예산을 배정하지도 아니하였으며, 1999년 5월 하순경 사업 부지 확보 및 사업비 조달의 곤란, 국가 경제의 어려움에 따른 수출 1,000억 불 기념사업의 의미 퇴색 등을 이유로 이 사건 조형물 건립사업을 취소하였습니다. 결국 피고는 원고와 사이에 위 선정된 시안을 기초로 한 구체적인 조형물 설립에 관하여 논의조차 하지 못한 상태에서 1999년 6월 8일 원고에게 위 취소 사실을 통보하였습니다. 한편 해양수산부는 1천여 년 전 동북아시아 해상무역권을 제패한 K의 해양개척정신을 계승하여 이를 국민적 사표로 삼아 국민들에게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21세기 해양부국 건설의 정신적 기반을 마련한다는 것을 목표로 내걸고 1998년 11월부터 2010년 12월까지 사이에 국고 611억 원과 민자 690억 원의 총사업비를 들여 '해상 왕 K 재조명, 평가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피고는 그 사업의 일환으로 해양수산부와 협의하여 D 센터 부지에 신축 중인 L 센터 앞에 L 센터의 건설회계에 이미 책정되어 있는 예술 장식품 예산 중 일부를 들여 '해상 왕 K 상징조형물'을 건립하기로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피고는 1999년 8월 20일 위 조형물의 건립추진 위원회를 구성하고 이 사건 조형물 건립 과정과 같은 방식으로 소외 M을 조형물 제작 및 설치자로 선정한 후 같은 해 M과 사이에 대금 8억 5,000만 원에 K 기념 상징 조형물 제작, 납품 및 설치 계약을 체결하였고, M은 2000년 5월경 위 상징 조형물을 위 부지에 제작하여 설치하였습니다. 요약하자면, 심사위원회에서 1996년 원고가 제출한 1000억 불 달성 조형물 시안이 최종 시안으로 선정되었고 통보를 받았으나, 1999년 5월경 해당 조형물 건립사업이 취소되어 원고에게 통지되었고, 이후 1999년 11월경 같은 부지에 해상 왕 K 상징 조형물이 건립되어, 원고가 피고를 사단법인 한국무역협회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안입니다.
2. 관련 법률과 대법원 판례 법리
대법원은 1) 계약이 성립하기 위하여는 당사자의 서로 대립하는 수개의 의사표시의 객관적 합치가 필요하고 객관적 합치가 있다고 하기 위하여는 당사자의 의사표시에 나타나 있는 사항에 관하여는 모두 일치하고 있어야 하는 한편, 계약 내용의 '중요한 점' 및 계약의 객관적 요소는 아니더라도 특히 당사자가 그것에 중대한 의의를 두고 계약 성립의 요건으로 할 의사를 표시한 때에는 이에 관하여 합치가 있어야 계약이 적법, 유효하게 성립한다고 합니다. 또한 대법원은 2) 계약이 성립하기 위한 법률요건인 청약은 그에 응하는 승낙만 있으면 곧 계약이 성립하는 구체적, 확정적 의사표시여야 하므로, 청약은 계약의 내용을 결정할 수 있을 정도의 사항을 포함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합니다. 한편, 대법원은 3) 어느 일방이 교섭 단계에서 계약이 확실하게 체결되리라는 정당한 기대 내지 신뢰를 부여하여 상대방이 그 신뢰에 따라 행동하였음에도 상당한 이유 없이 계약의 체결을 거부하여 손해를 입혔다면 이는 신의성실의 원칙에 비추어 볼 때 계약 자유원칙의 한계를 넘는 위법한 행위로써 불법행위를 구성한다는 입장입니다. 또한 대법원은 4) 계약 교섭의 부당한 중도파기가 불법행위를 구성하는 경우 그러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는 일방이 신의에 반하여 상당한 이유 없이 계약 교섭을 파기함으로써 계약체결을 신뢰한 상대방이 입게 된 상당 인과관계있는 손해로서 계약이 유효하게 체결된다고 믿었던 것에 의하여 입었던 손해 즉 신뢰 손해에 한정된다고 할 것이고, 이러한 신뢰 손해란 예컨대, 그 계약의 성립을 기대하고 지출한 계약 준비 비용과 같이 그러한 신뢰가 없었더라면 통상 지출하지 아니하였을 비용 상당의 손해라고 할 것이며, 아직 계약 체결에 관한 확고한 신뢰가 부여되기 이전 상태에서 계약 교섭의 당사자가 계약 체결이 좌절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지출한 비용, 예컨대 경쟁입찰에 참가하기 위하여 지출한 제안서, 견적서 작성 비용 등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덧붙여 대법원은 5) 침해행위와 피해 법익의 유형에 따라서는 계약 교섭의 파기로 인한 불법행위가 인격적 법익을 침해함으로써 상대방에게 정신적 고통을 초래하였다고 인정되는 경우라면 그러한 정신적 고통에 대한 손해에 대하여는 별도로 배상을 구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3. 판례의 결론과 유의미한 교훈
대법원은 2003년 4월 11일 선고 2001다 53059 판결에서, 1) 비록 피고가 작가들에게 시안 제작을 의뢰할 때 시안이 당선된 작가와 사이에 이 사건 계약을 체결할 의사를 표명하였다 하더라도 그 의사표시 안에 이 사건 조형물의 제작, 납품 및 설치에 필요한 제작대금, 제작 시기, 설치 장소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아니하였던 이상 피고의 원고 등에 대한 시안 제작 의뢰는 이 사건 계약의 청약이라고 할 수 없고, 나아가 원고가 시안을 제작하고 피고가 이를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하더라도 원고와 피고 사이에 구체적으로 이 사건 계약의 청약과 승낙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할 것이어서, 이 사건 계약이 체결되지 아니하였다는 원심의 판단이 정당하다고 보았습니다. 2) 다만, 대법원은 비록 원고, 피고 사이에 이 사건 계약에 관하여 확정적인 의사의 합치에 이르지는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계약의 교섭 단계에서 피고가 원고 등 조각가 4인에게 시안의 작성을 의뢰하면서 시안이 선정된 작가와 조형물 제작, 납품 및 설치에 관한 이 사건 계약을 체결할 것을 예고한 다음 이에 응하여 작가들이 제출한 시안 중 원고가 제출한 시안을 당선작으로 선정하고 원고에게 그 사실을 통보한 바 있었으므로 당선 사실을 통보받은 시점에 이르러 원고로서는 이러한 피고의 태도에 미루어 이 사건 계약이 확실하게 체결되리라는 정당한 기대 내지 신뢰를 가지게 되었다고 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원고는 그러한 신뢰에 따라 피고가 요구하는 대로 이 사건 조형물 제작을 위한 준비를 하는 등 행동을 하였을 것임에도, 앞서 본 바와 같이 피고가 원고와는 무관한 자신의 내부적 사정만을 내세워 근 3년 가까이 원고와 계약체결에 관한 협의를 미루다가 이 사건 조형물 건립사업의 철회를 선언하고 상당한 이유 없이 계약의 체결을 거부한 채 다른 작가에게 의뢰하여 해상 왕 K 상징조형물을 건립한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비추어 볼 때 계약 자유 원칙의 한계를 넘는 위법한 행위로써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은 3) 원고가 이 사건 계약의 체결을 신뢰하고 지출한 비용이 있음을 뒷받침할 아무런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원고의 상고를 기각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대법원은 2심 법원의 판결을 그대로 유지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본 계약에 앞서 회사들이 흔히 체결하는 MOU, 또는 양해각서와 같은 사안들과 관련해서도 같은 논리로 문제가 됩니다. 언론 보도에서 MOU, 양해각서를 체결한 사실에 대하여 대서특필을 하고, 법무팀을 가지지 않은 혹은 법률자문을 받지 않는 일반적인 중소기업 또는 개인사업자들은 MOU를 체결하였다는 이유로 많은 비용을 본 계약도 체결하기 전에 사전 투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MOU는 기본적으로 법적 구속력이 없는, 즉 본 계약이 아니기 때문에, MOU를 위반하였으므로 손해를 배상하라는 식의 주장은 받아들여지기 어렵습니다. 본 사건의 경우, 계약의 성립을 위한 법적 구속력이 인정되는 확정적 의사표시인 청약과 승낙이 인정되지 않았던 것도 대법원이 계약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 이유가 됩니다. 따라서 이 블로그를 읽으시는 독자께서는, MOU가 체결되었다고 하여 본 계약이 체결되었다고 생각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MOU가 체결되었다고 비용을 과도히 투하하였고 자기 책임 하에 투하한 것으로 평가되는 한, 계약 교섭의 중도 파기 논리를 사용하기 어렵기 때문에, 매우 주의를 요합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MOU 체결 이후 비용 투하에 앞서, 상대방은 어떤 입장인지 공문으로 확인하여, 비용 투하에 따른 상대방의 책임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상대방이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할 경우에는 그 비용 투하를 자제하시는 것이 후회하지 않는 길일 수 있습니다. 계약 교섭의 부당파기 손해배상 청구 사례를 소개해 드렸습니다.